조선 선조 때의 문신(1561~1592). 자는 여진(汝進). 호는 과재(果齋). 1587년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중국 명나라에 갔다가 이성계가 이인임의 후손이라는 잘못된 기사를 바로잡고, 1590년 광국 공신 2등이 되어 용성 부원군에 봉해졌다. 임진왜란 때 종사관으로 상주에 내려가 박호(朴箎)·이경류(李慶流)와 함께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.
조선 영조 때의 문신·서예가(1680~1741). 자는 중화(仲和). 호는 백하(白下)·학음(鶴陰)·나계(蘿溪)·만옹(漫翁). 대제학 등을 거쳐 공조·예조 판서에 이르렀으며, 당대의 이름 높은 서예가로 중국 송나라의 미남궁체(米南宮體)를 터득하였다. 문집으로 ≪백하집≫이 있다.
명사 · 조선 선조 때의 문신(1561~1592). 자는 여진(汝進). 호는 과재(果齋). 1587년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중국 명나라에 갔다가 이성계가 이인임의 후손이라는 잘못된 기사를 바로잡고, 1590년 광국 공신 2등이 되어 용성 부원군에 봉해졌다. 임진왜란 때 종사관으로 상주에 내려가 박호(朴箎)·이경류(李慶流)와 함께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.
명사 · 조선 영조 때의 문신·서예가(1680~1741). 자는 중화(仲和). 호는 백하(白下)·학음(鶴陰)·나계(蘿溪)·만옹(漫翁). 대제학 등을 거쳐 공조·예조 판서에 이르렀으며, 당대의 이름 높은 서예가로 중국 송나라의 미남궁체(米南宮體)를 터득하였다. 문집으로 ≪백하집≫이 있다.
명사 · 구한말의 무신(1840~1911). 윤치호의 아버지. 고종 17년(1880) 별군관으로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다녀와서 별기군을 창설하였고, 갑신정변 때는 김옥균을 도와 거사한 후 형조 판서가 되기도 하였으나, 정변의 실패로 능주(綾州)로 유배되었다. 뒤에 갑오개혁으로 경무사와 군부대신이 되었으며,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(男爵)을 받았다.
명사 · 조선 광해군 때의 문신(1555~1623). 자는 인지(訒之). 선조 34년(1601) 생원을 거쳐 문과에 급제하고 대사헌·대사간에 이르렀으며, 이각(李覺)·정조(鄭造) 등과 함께 폐모론(廢母論)을 주창하여 인목 대비를 서궁(西宮)에 유폐시켰다. 인조반정 때 사형되었다.
명사 · 조선 중기의 문신(1487~1545). 자는 임지(任之). 장경 왕후의 오빠로, 대윤(大尹)의 거두였다. 무과에 급제하여 경주부윤에 올랐으며, 문정 왕후가 수렴청정할 때, 윤원형과 세력 다툼을 벌이다가 소윤(小尹) 윤원형 형제가 일으킨 을사사화로 아들 삼 형제와 함께 처형되었다. 선조 때 누명이 벗겨졌다.
명사 · 조선 효종·현종 때의 학자(1617~1680). 자는 희중(希仲). 호는 백호(白湖)·하헌(夏軒). 경서를 독창적으로 해석하였으며, 이황과 이이의 학설을 절충하여 ‘사단 칠정 인심 도심설(四端七情人心道心說)’을 내세웠다. 벼슬은 우참찬과 이조 판서에 이르렀으며, 경신대출척 이후 귀양 갔다가 처형되었다.
명사 · 조선 인조 때의 문신(1564~1638). 자는 시회(時晦). 호는 도재(陶齋)·청강(晴江). 선조 28년(1595) 별시 문과(別試文科)에 병과(丙科)로 급제하여, 벼슬은 우승지(右承旨)까지 이르렀다.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, 병자호란 때에 여러 차례 왕을 호종하였다. 저서에 ≪계음만필(溪陰漫筆)≫, ≪도재집≫, ≪도재수필≫ 따위가 있다.
명사 · 조선 중기의 학자(1553~1630). 자는 극흠(克欽). 호는 서계(西溪). 선조 33년(1600)에 왕자의 스승이 되고, 형조 좌랑을 지냈다. 역학에 뛰어나 이름을 떨쳤으며, 음악에도 뜻을 두어 ≪현금동문유기(玄琴東文類記)≫라는 귀중한 거문고 악보를 후세에 남겼다. 저서에 ≪서계집≫ 따위가 있다.